도산 안창호 기록관
Dosan Media
제2호 / 전4호
리버사이드, 레드랜즈, 샌프란시스코
1903–1920
파차파는 노동 캠프였다
코리아타운도, 독립운동의 메카도, '도산 공화국'도 아니다. 1913년 냉해 뒤 텅 빈 판잣집 이주노동 캠프였다. 1908년 샌본 지도 두 장이 보여준다. 교회도, 노동국도, 가게도 레드랜즈에 있었다.
사설
나는 UC 리버사이드와 리버사이드시의 누구든 파차파 캠프를 두고 공개 토론하자고 요구해 왔고, 지금도 요구한다. 왜 숨는가. 이것은 조작이다.
1908년 샌본 화재보험 지도 두 장을 보라. 왜 1908년 리버사이드 지도에는 한인 교회가 없는가. 레드랜즈의 한인 감리교회는 1906년에 세워졌고, 리버사이드 장로교 선교소보다 앞선다. 1908년 레드랜즈 지도에는 그 교회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고, 한인 노동국과 한인 세탁소가 있으며, 카사 로마 호텔에는 한인 열 명이 살며 일했다. 샌본은 파차파의 주거를 '판잣집(shanties)'이라 적었는데 책은 왜 '건물'이라 부르는가. 파차파는 조잡하게 지은 판잣집 빈민촌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타운'이 되는가.
1908년 지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장태한이 아니다. 이선주가 2006년 기독교 헤럴드의 『태평양 너머 무지개』 1권 228쪽에 이미 실었다. 서울 도산기념관에는 장태한이 2016년에 발견했다고 주장하기 훨씬 전부터 액자에 넣은 이 지도가 걸려 있었다.
리버사이드에 한인이 천 명? 리버사이드에 초기 이민 세대 한인이 천 명 산 적은 없다. 파차파가 노동 캠프이던 시절 캘리포니아주 전체에 한인 천 명이 있었다는 미국 이민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차파를 찾아낸 사람은 도산이 아니다. 이강과 임준기다.
필립 안 커디
이 둘을 나란히 보라
문서 · 1908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1908년 레드랜즈 샌본 지도: 한인 감리교회, 테두리 표시

1908년 레드랜즈 샌본 화재보험 지도, 웨스트 스테이트가와 새크라멘토가. 새크라멘토 애비뉴 11번지의 한인 감리교회가 빨간 네모로 표시되어 있다.
1906년 레드랜즈 한인 교회 사진 외에도, 이 교회는 1908년 레드랜즈 샌본 화재보험 지도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레드랜즈의 한인 사회는 리버사이드보다 앞서 있었다. 국민회 제1차 대회는 1909년 레드랜즈에서 열렸다.
『파차파 캠프』는 왜 1908년 레드랜즈 지도를 싣지 않았는가. 기록은 1908년 레드랜즈에 더 발전한 한인 사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8년 지도. 2023년 주석 ·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1908년 리버사이드 샌본 지도: 한인 교회가 없다

코리아타운 주장을 다룬 기사에 실린 파차파 구역의 1908년 샌본 화재보험 지도. 빨간 글씨는 내 메모다. 1908년 리버사이드에 샌본이 표시한 한인 교회는 왜 없는가?
UC 리버사이드, 리버사이드시, 대한민국 총영사관, 미주 한인 언론이 모두 장태한을 전문가라 한다. 1908년 리버사이드 샌본 화재보험 지도에 한인 교회는 왜 없는가?
샌본은 파차파의 주거를 '판잣집(shanties)'으로 판정했는데 『파차파 캠프』와 이선주는 왜 '건물'이라 부르는가. 파차파는 조잡하게 지은 판잣집 빈민촌이었다. 이주노동 캠프가 어떻게 '타운'이 되는가.
'정착지(settlement)'는 샌본 지도 회사가 보험 계리를 위해 쓴 용어이지 사회학적 판정이 아니다. 샌본은 기준에 맞으면 차이나타운이나 스패니시타운이라 썼다. 여기에는 타운이라 쓰지 않았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머리기사
문서 · 1910·1920년 인구조사, 1933년 인쇄 표
1910년 미국 본토의 한인 전부: 462명

미국 인구조사 표 15.2, 1910년과 1920년 본토와 하와이의 지역별 한인 분포. 캘리포니아: 1910년 304명, 1920년 772명. 본토 전체: 1910년 462명, 1920년 1,224명.
리버사이드에 초기 이민 세대 한인이 천 명 산 적은 없다. 파차파가 노동 캠프이던 시절 캘리포니아주 전체에 한인 천 명이 있었다는 미국 이민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의 질 코완은 파차파에 천 명이라고 썼다. 인구조사는 주 전체에 304명을 셌다.
필립 안 커디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20번 슬라이드에 실린 표 · 검증된 1차 자료
나머지 기록
문서 · 2006년 ·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같은 지도, 2006년 출판

2006년 기독교 헤럴드 『태평양 너머 무지개』 1권 228쪽에 실린 1908년 리버사이드 샌본 지도. 장태한이 발견했다고 말하는 때보다 10년 전이다.
1908년 샌본 화재보험 지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장태한이 아니다. 장태한이 참고 자료로 드는 이선주가 2006년 기독교 헤럴드 『태평양 너머 무지개』 1권 228쪽에 1908년 리버사이드 샌본 지도를 실었다.
서울 도산기념관에는 최종호 관장이 리버사이드를 방문했을 때 받은 1908년 샌본 지도 액자가, 장태한이 2016년에 발견했다고 주장하기 훨씬 전부터 걸려 있었다.
UC 리버사이드 자신의 말: "파차파 캠프의 이야기는 장 박사가 '한인 정착지'를 표시한 1908년 샌본 보험 지도를 발견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출판되고 액자에 걸린 지도를 장태한이 어떻게 발견하는가?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2002년 8월 16일 · 버지니아 폴스처치
2002년: '미국 본토 최초의 코리아타운'은 리들리/디누바였다

2002년 8월 16일 버지니아 폴스처치 국제한국학회(ICKS) 학술대회 프로그램. 제1패널 발표: "미국 본토 최초의 코리아타운: 캘리포니아 리들리/디누바", 차만재 박사, 캘리포니아 주립대 프레즈노.
리버사이드시가 파차파를 지정하기 15년 전, 한국학 학자들은 이미 최초의 코리아타운을 지목했고, 그곳은 리버사이드가 아니었다. 장태한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
필립 안 커디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3번 슬라이드에 실림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7년 6월 16일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도산이 레드랜즈의 아내에게, 1907년 6월 16일

한국에 있던 도산이 캘리포니아의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봉투. 수신인 Mrs. H. L. Ahn, 사서함 448, 레드랜즈. 1907년 6월 16일 레드랜즈 소인.
남은 것은 편지가 아니라 봉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1907년 6월 내 할머니는 아들 필립과 함께 리버사이드가 아니라 레드랜즈에 살고 있었다. 책 『파차파 캠프』 3쪽은 "도산의 가족이 리버사이드에 거주했다"고 쓴다. 우체국은 레드랜즈라고 했다.
도산은 한국으로 돌아가 있었다. 조직 사업이 요구한 긴 이별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7년 5월 20일 발신, 6월 11일 수신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도산이 레드랜즈의 아내에게, 1907년 5월 20일 발신

한국의 할아버지가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사서함 448 Mrs. C. H. Ahn, 내 할머니에게 보낸 두 번째 봉투. 1907년 5월 20일 발신, 6월 11일 수신.
3주 간격의 봉투 둘, 둘 다 레드랜즈로. 『파차파 캠프』 3쪽은 가족이 리버사이드에 거주했다고 쓴다.
필립 안 커디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32번 슬라이드에 설명문 · 검증된 1차 자료
사진 · 1906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레드랜즈 한인 감리교회, 1906년

1906년 세워진 레드랜즈 한인 감리교회 앞의 서른 명. 뒷줄 오른쪽이 방화중 목사. 검은 양복 남자 왼쪽에 선 이가 임춘구 목사.
리버사이드 장로교 선교소보다 먼저 세워졌다. 2006년 『태평양 너머 무지개』 3권 47쪽에 실렸다.
남캘리포니아에서 여성이 있던 곳은 리버사이드만이 아니다. 레드랜즈에도 여성과 가족이 있었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8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레드랜즈, 1908년: 한인들이 살던 곳

웨스트 스테이트가와 새크라멘토가의 1908년 레드랜즈 샌본 지도. 왼쪽 위 웨스트 스테이트 505번지에 이원보가 살았다. 오른쪽 끝 건물이 새크라멘토 애비뉴 11번지 한인 감리교회.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8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한인 노동국, 레드랜즈 실베리아가 201번지

1908년 샌본 지도의 레드랜즈 실베리아가 201번지 한인 노동국 사무소. 노동국은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의 일부로 시작되었고, 리버사이드뿐 아니라 레드랜즈에도 사무소가 있었다.
한인 노동국은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친목회의 일부로 시작되었다. 회장은 도산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리버사이드 외에 레드랜즈에도 노동국 사무소가 있었다.
친목회 노동 알선소는 도산이 가기 전에 이강, 임준기, 정재관, 임치경을 감귤 노동 시험조로 리버사이드에 보냈다. 파차파 캠프를 찾아낸 사람은 이강과 임준기다. 도산이 아니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8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레드랜즈 차이나타운의 한인 세탁소, 1908년

1908년 샌본 지도의 루고니아가와 오리엔탈 애비뉴 모퉁이 레드랜즈 차이나타운. 오리엔탈 애비뉴 308번지에 한인 세탁소, 옆 304번지에 중국인 세탁소.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8년 ·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카사 로마 호텔, 레드랜즈 콜튼 애비뉴 1번지

1908년 레드랜즈 샌본 지도 오른쪽 위의 콜튼 애비뉴 1번지 카사 로마 호텔. 한인 열 명이 이 호텔에서 일하며 살았다. 왼쪽 아래는 한인 감리교회와 이원보의 집.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날짜 미상 · 캘리포니아 레치 캐니언
리치 캐니언의 한인 정착지

레드랜즈 남서쪽, 리버사이드 동쪽 리치 캐니언의 한인 정착지. '최초의 코리아타운' 주장이 빠뜨린 다른 한인 정착지 가운데 하나.
다른 한인 정착지들의 존재는 간과되거나 가려졌다. 리버사이드가 독립운동기의 어떤 중심지였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리버사이드만 골라내는 것은 재미 초기 한인들의 애국정신과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필립 안 커디 · 소장 자료, 출처 미확인
문서 · 1899–1920년
미국에 입국한 한인, 1899–1920년

표 15.1: 1899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에 입국하고 출국한 한인 외국인과 이주 외국인, 미국 이민국장 자료. 1905년: 4,929명 입국, 정점. 1906년: 127명. 1907년: 30명.
1903–1905년 하와이 농장 이민, 그 뒤로는 거의 없다. 파차파 사람들은 그 인력에서 나왔다. 리버사이드로 천 명이 흘러든 일은 없었다.
필립 안 커디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20번 슬라이드에 실린 표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09년 2월 10일 ·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1909년 2월 10일

1909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The New Korea) 지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장태한이 대학원 인턴들에게 번역시킨 바로 그 신문.
신한민보는 수십 년 동안 자격 있는 연구자들이 연구해 왔다. 지방 사투리와 한문이 섞인 옛 한국어로 쓰여 있어 뜻과 글자를 오독하기 쉽다.
빠진 1911년 10월 11일자는 도산이 1911년 돌아왔을 때 가족이 리버사이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장태한의 주장과 분명히 어긋난다. 도산은 로스앤젤레스 환영회에 들르기 전 디누바에서 가족을 만났다.
필립 안 커디 · 검증된 1차 자료
사진 · 1911년 ·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모임, 1911년

UC 리버사이드가 'USC 코리안 아메리칸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191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회'라고 싣고, 독립기념관이 '파차파 캠프 국민회 모임'이라고 싣는 그 사진. 리버사이드 노동 알선소, 국민회 모임, 1911년.
국민회 제3차 대회가 리버사이드였다. 제1차는 1909년 레드랜즈, 제2차는 1910년 클레어몬트, 가장 컸던 제4차는 1912년 샌프란시스코. 1911년 대회는 로스앤젤레스를 본부로 정했다.
UC 리버사이드가 쓰는 사진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쓰는 사진 거의 전부가 내가 관리하는 헬렌 안 컬렉션에서 나왔다.
필립 안 커디 · 헬렌 안 컬렉션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34, 37, 38번 슬라이드. UCR은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회'로 설명함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1993년
엘런 툰이 수잔에게: "하트워머스는 가슴앓이만 늘어간다"

엘런 툰이 수잔 안 커디에게 쓴 손편지: "수잔 — 기억나는 대로 적은 돌리의 인터뷰예요. 하트워머스는 '가슴앓이'만 늘어가네요! 엘런."
엘런 툰의 『하트워머스』에 바탕한 파차파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가 아니다. 진실을 감추는 리버사이드의 부정직한 사람들이 만든 선전이다. 엘런 툰이 쓴 『하트워머스』 거의 전부를 수잔 안 커디와 필립 커디가 함께 작업했다.
필립 안 커디 · Press-Conference-Pachappa.pptx (필립 안 커디) 28–30번 슬라이드 · 검증된 1차 자료
문서 · 출전 미확인
레드랜즈, 1905년 12월 26일. 리버사이드, 1906년 3월 16일.

공립협회가 지방회를 세운 시기를 기록한 구절, 가족이 표시해 둔 것. 레드랜즈가 먼저, 1905년 12월. 리버사이드는 이듬해 3월.
구절: "1905년 11월 공립협회는 한국이 처한 위기를 세상에 알리고 해외 민족운동을 주창하기 위해 송석준에게 공립신보 편집을 맡겼다. 같은 날 총회장 도산은 조직 확장을 지도하기 위해 리버사이드와 레드랜즈를 방문했다. 1905년 12월 26일 레드랜즈에, 1906년 3월 16일 리버사이드에 지방회를 세웠다. 멀리 와이오밍 록스프링스에도 지방회가 세워졌다. 1907년 6월까지 다섯 지방회에 600명이 가입했다."
레드랜즈가 먼저, 1905년 12월. 리버사이드는 석 달 뒤. 이 쪽이 실린 책이 확인될 때까지 초안으로 둔다. 연표는 출전을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재 매체 미확인 · 가족의 기자회견 자료에 실린 페이지. 원 출판물은 그 자료에 표시되지 않음